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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O난감

더글로리 이후 딱 1년만에 넷플릭스 드라마 정주행했다. 살인자o난감.

 

1. 노빈이 외치던 정의가 진심이었다는 걸 알 수 있어서 좋았다. 물론 노빈의 정의구현 방식에 동의하기 어렵다. 다만 그는 자신의 방식에 책임이 따른다는 걸 알았고, 책임지려 했다. 거기에 더해, 자신의 정의를 행동으로 실현해주는 이탕을 끝까지 지키고자 했다. 즉의 선택에는  나름 완결성이  있고, 그 점은 인정한다.

 

2. 결코 정의롭지 않은 어른들의 세계, 어떤 사람, 어떤 행위를 부정의하다고 처단하는 건 가능한가... 그건 또 정의로운가? 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을 던지는 드라마다.  

 

3. 장난감의 동료 박형사는 후배에게 형사 생활이 교도소 담장위를 걷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삐끗하다 밖으로 떨어지면 그냥 일반인으로 살지만, 교도소 담장 안으로 떨어지면 범죄자가 되는 것이라며. 형사만 그럴까? 사실 우리 모두 그렇게 살고 있는지 모른다. 거창하게 정의와 부정의의 경계 언저리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3. 완벽한 균형? 움직이지 않으면 된다. 걷기, 달리기... 한 발을 내딛는 순간 균형을 잃지만 다시 다른 발을 앞으로 뻗으며 균형을 찾는다. 그래서 진짜 균형은 아주 짧은 찰라일뿐이다. 걷고 달리는 순간의 균형이란.

 

4. 넘어지지 않으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건 영원한 균형이 아니라 짧은 균형의 반복을 선택한 결과다.  진보란 그런 것이다. 흔들리고, 흔들리면서 균형을 만들고 그 힘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정의도 그렇다. 부정의를 경계하지 않는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정의롭기 위해서는 모순을 견디는 것, 유혹을 이기는 것이다.

 

5. 장난감이 법 그 이상을 넘어서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좋았다. 원작은 어땠는지 모르나, 노빈을 만나기 전 이탕의 살인은 우연의 결과고, 적어도 8부작 드라마 안에서 이탕은 노빈이 기대하는 어떤 능력 즉 악인을 알아보는 그런 능력은 없다. 물론 악인을 만나면 소름이 끼치고 닭살이 돋지만, 상대를 악인으로 각성하는데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나중에 아, 어쩐지 이상하더라...정도다. 이건 특별한 초능력이 아니라, 누구나 한번쯤 겪는 일 아닌가? 어쨌거나 우연한 살인 후 이어지는 이탕이 저지른 몇 번의 추가 살인은 노빈이 기획한, 아니 청부한 살인일 뿐이었다. 만약 이 드라마에서 이탕을 신기(?) 한 어떤 능력자로 묘사했다면 "어떤" 살인은 정당할 수도 있다는 걸 전제로 구축된 SF가 되었을 것이고,SF 세계에서 법은 필요 없다. 장난감이 끝없이 참고, 절제하고, 견제할 이유가 없어지겠지. 그리되엇으면 장난감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바뀌었을 것이다.  

 

6. 선과 악. 이탕에게 살해당한 자들은 분명 악행을 반복해서 저지르고 반성할 줄 모르는 아주 나쁜 인간인 것은 맞다. 범인을 제대로 벌하지 않는 세상이 답답하지만 송촌 같은 사람이나 노빈과 이탕이 짝을 이뤄 나쁜 놈들을 다 처단하면 세상은 선해지는가? 그런 세상은 진정 정의로울까? 그런 세상은 존재한적이 없다. 미래에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세상이 정의롭다고 말할 수도 없다. 잡초가 자라면 그럴때마다 뽑는 수 밖에. 잡초를 없애려고 독약을 뿌리면 벼도 죽는다.

 

7. 흥미로운 드라마다. 등장인물, 그들 사이에 얽힌 사연과 관계 하나 하나가 다 깊은 골짜기를 품고 있다. 그 골짜기에 물줄기가 만들어지고, 내가 되고, 강물이 되겠지. 내 능력이 모자라서 우선 여기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