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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란을 찬양하라

영화 오펜하이머. 영화 끝나고 첫 소감은 이랬다. 1천 쪽 짜리 다큐 책을 3시간 동안 숨도 안쉬고 몰아 본 느낌이라는 것. 영화관 의자에 앉아서 봤는데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숨이 가빠 헐떡 거리는 것 같은? 

 

대단하다.

 

어려울 것이라고도 하고, 대사가 너무 많다고도 하고, 배경을 모르면 따라가기 힘든 대중적이지 않은 영화라는 평을 봤다.

 

다 맞는 얘기다. 하지만 이것도 맞다. 영화를 이해하고, 오펜하이머가 처한 난감한 현실과 고뇌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것.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예민하고 오만하며, 걍퍅하면서 자의식 충만한 이 자유로운 영혼의 복잡한 내면이 현실과 부딪칠때 내는 파열음과 광채를 놀랍도록 섬세하고 정교하게 직조해 냈다.

 

오펜하이머는 공산당원은 아니지만, 당시 지식인들이 대부분 그러했듯 노동운동과 반파시스트 운동에 공감하고 교수노조, 연구자 동맹 따위를 만드는 일에도 관여했다. 이런 사람이 미국 정부의 핵실험 연구사업(맨하탄 프로젝트)에 참여한 것은 어울리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건 현재 시점에서 결과를 알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그는 중성자가 원자핵을 때렸을 때 일어나는 화학반응이 인명 살상 무기에서 머물지 않고 지구 대기를 다 불태워버릴 가능성을 경계한다. 다행(?)스럽게 그럴 가능성은 0에 수렴하지만, 완벽한 0은 아니라는 사실. 이렇게 위험을 알지만 이 핵폭탄을 나찌가 먼저 만들어 히틀러 손에 들어가게 되는 걸 우려했고, 핵실험 결과로 가공할만한 위력을 확인하여 데이터를 공개하는 것만으로 전쟁을 끝내고, 나아가 전쟁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은 끝났지만, 핵확산은 저지되지 않았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핵실험에 성공한 후다.

 

핵실험 성공 순간 이 가공할 무기가 초래할 재앙을 직감한 순간을 환각(모든 소리가 그치고 강력한 빛이 세상의 색을 다 먹어버렸으며, 찢어진 종이장처럼 벗겨지는 피부의 얼굴을 한 사람들의 모습)에 빠진 오펜하이머의 넋이 나간 참담한 표정은 이후 오펜하이머가 처한 딜레마를 상징한다. 그리고 이 딜레마는 관객에게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핵실험은 옳은가? 해야만 했나? 하지 않았어도 되는 것이었나? 정말 핵폭탄이 전쟁을 끝낼 유일한 무기였나? 과학의 진보는 인류에게 축복인가, 재앙인가? 오펜하이머가 아니었대도 원자폭탄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나? 무엇보다 핵은 정말 다른 전쟁을 막는데 유효한가? 그리고...지금 인류는 파괴와 종말을 피할 수 있을까? 

 

핵폭탄이 로스앨러모스 연구소 밖으로 나가는 순간,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진행한 연구 결과물을 통제할 수 없게 된다. 국제 기구를 만들어 핵확산을 막아야 하고, 소련과도 데이터를 공유하자고 하는 오펜하이머을 트루먼은 폭탄 사용을 허가해서 전쟁을 끝낸건 자신이라면서 징징대는 겁쟁이 취급을 한다. 결국 소련에 정보를 넘긴 스파이가 되어 사회적으로 매장당한다. 이 영화의 원작은 오펜하이머의 전기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다. 신에게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건넨 프로메테우스는 바위에 묶여 날마다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형벌을 받는다. 인류에게 원자핵 에너지를 만들고 이용하는 법을 알려준 오펜하이머는 그 죄로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으로 보상(?) 받는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본인의 지식 자기과시와 허영을 충족하고 싶어 영화를 만드는게 아닐까:? 그러거나 말거나, 그 허영심 덕분에 이런 고급스러운 잘 만든 영화를 즐기고, 나 역시 내 지적허영심을 조금 채웠으니...그럼 됐지 뭐. 아주 흥미롭고, 재밌는..재미있다는 말로는 다 표현하기 어려운데...영화로는 만족도 높은, 작품성 뛰어난 영화다.

 

감화를 주는 영화는 아니다. 질문하는 영화다. 지구 곳곳에 핵폰탄은 이미 수천개는 만들어져 있을테고, 이 핵폭탄이 터지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는데, 점점 지구는 핵에너지 아니어도 주체할 수 없을만큼 더워지는데 당신은 어떻게 살테냐고 묻는 영화다. 인류는 살아 남을 수 있을까.... 화면이 하해지듯,,,, 머리가 하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