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척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글을 시작하기가 무섭다. 한 권을 다 통째로 외우고 싶고,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싶어서다. 1945년 8월15일 이후 고작 4개월 반 동안 한반도에서 벌어진 사건 하나하나가 엄청남 의미가 있고, 당시에도 파장이 큰 것들이서다. 게다가 이 책에는 드러나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건말고, 감춰져 있어서 몰랐으나 사실은 한국 현대사를 결정지은 사건들의 진상을 담고 있으니 짧은 소감문으로 담기 전에 내 지적 역량으로 설명하기가 벅차기 때문이다.
특히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망 전부터 그 상황을 예건하고 준비했던 여운형의 건국동맹의 건준으로 상징되는 해방과 완전한 민주국가 건설의 벅찬 희망이 좌절에 이르는 시간은 짧고, 짧은 만큼 드라마틱하고 격렬해서 감당하기 어렵다. 엄청나게 분출했던 희망이 절망으로 귀결되는 과정은 말로다 다 표현하기 어려울만큼 안타깝고, 슬프고, 무엇보다 서럽다.
건준이 당초 계획대로 총독부한테서 행정권을 이양받고 순차적으로 건국을 준비했다면 한국 현대사의 경로는 달라졌을까? 분단과 한국 전쟁의 비극은 없었을까?
아쉽게도 이 시기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는 힘은 외력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던 것 같다.
건준과 인민위원회의 조직, 그들이 지역 단위로 일제의 공권력을 제압하고 자치를 펴가는 모습을 혼란으로 이해한 사람들은 바로 아직 남아있던 총독부 간부들과 이들에 부역한 친일파였다. 미군이 진주하지 않고, 진주했더라도 한국인에게 자치를 인정했더라면, 우리에게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조선이 비록 망했지만 500년 넘게 중앙집권 왕조체제를 유지하던 나라다. 한국인의 행정 능력, 자치 능력이 부족하다는 판단은, 근거가 없다. 스스로 뭘 해볼 기회를 봉쇄당했으니까.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한 것은 미군정이라는 외세고, 연합국(주로 미국, 소련, 영국, 중국)의 판단이었고, 한반도는 우리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힘은 쎄고, 그러면서 동시에 무관심한 집단의 무지에 지배당했다.
그리고 한 가지 힘이 더해졌다. 이들의 무지를 이용한 내부 세력의 교활함. 한민당과 이승만은 어떻게든 한국을 빨리 떠나고 싶었던 일리노이 개신교 가정에서 자란 하지에게서 불하받은 권력으로, 해방 직후까지 한국 정치 지형을 주도했던 좌파세력(비공산주의적 좌파 혹은 사회주의적 좌파와 공산주의세력)은 물론 김구의 임정까지 무력화를 시도하고 성공했다.
저자는 미군 진주 초기 상황은 우연한 사건들의 연쇄가 일정한 흐름을 만들었고 이때 결정된 정책이 이후 3년간 미군정을 이끌어간 관성과 동력을 만들었다고 평한다. 나는 우연이 연속하면 그게 우연은 아닐 것이고, 그렇게 만들어진 관성과 흐름은 3년이 아니라 이후 한국전쟁과 분단의 지속, 한국 정치와 사회를 거의 결정했다고 본다.
그 우연이 만든 관성의 결정판.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우리가 아는 반탁은 반쪽짜리라는 점을 알게 된 것이다. 저자는 한국 현대사의 운명을 좌우한 실질적인 동력과 모멘텀은 1945년 12월 동아일보의 오보(완벽한 오보. 신탁통치는 애초 미국이 제안했고, 소련과 중국이 동의한 것이었다.)로 시작한, 임정과 김구세력이 주도한 그 반탁이 아니라, 미군정 초기 미군정이 이승만과 결탁해 주도한 반탁 운동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놀랍다. 이 책은 어떤 이유로, 어떤 배경으로 미국 정부의 대한반도 정책에 어긋나는 특정 세력(독촉중협) 중심 정부수립 기도가 시작되고 전개되었는지를 매우 꼼꼼하게 설명한다. 물론 대부분 처음 듣는 얘기다.
이 책을 읽으며 새로 배운 것, 인상 깊은 것을 적자면, 앞에서 말했듯이, 책 한권을 다 여기에 적어야 할 판이다. 그렇게 할 시간도, 능력도 없다. 대신 이 책에서 언급한 수 많은 사람들 중 잊지 말아야 할 이름들이 있다. 조지 윌리엄스, 베닝호프(Harry Merrell Bennighhoff), 울리엄 랭턴, 이묘묵, 박석윤, 울리엄 랭턴, 노기남 주교, 백낙준, 김홍섭, 이인, 김병로. 조지 윌리엄스는 하지의 개인 통역으로 있으면서 기독교, 미국유학파, 한민당 출신 인사들을 하지에게 소개하고, 이들이 이후 한국 관계와 정계를 지배하게 만들었다. 정작 미국으로 돌아간 후 한국에서 활동을 자신의 경력에 적지도 않았다. 정말 이름없는 하찮은 존재들이 한 국가의 미래를 결정해 버린 것이다. 이묘묵과 박석윤은 대표적인 친일파이면서 미군정에서 자신의 경력을 세탁하고 친미파로 변신하는데 성공한 인물들이다. 김홍섭, 이인, 김병로는 한국 사법 역사에서 손꼽히는 명망가들이다. 강직하고 청렴한 법관의 전형인 것으로 존경 받는다. 이들이 한민당과 이승만을 위한 한 짓을 보면 현재 우리 사회 사법권력의 안하무인과 무도함의 시작을 짐작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서문 중 일부를 옮기며 글을 마친다. 이 책의 결론이고, 저자가 이 책을 쓴 목적일 것이다.
"시대라는 씨줄과 인간행동이라는 날줄로 직조된 역사는 그 시대만의 문양을 남긴다. 내가 읽은 해방 직후사는 찬란한 해방의 희망과 열정으로 시작해서 서로 밀어내고 증오한 끝에 분노와 좌절의 대충돌로 베틀의 첫 작업을 끝냈다. 수 많은 이들의 희망과 열정으로 시작해 분노와 좌절의 그라데이션으로 남은 해방과 분단의 시대가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명확하다. 외면하지 말것, 진실과 대면할 것, 용감하게 직시할 것, 감정적일 수 있으나 냉정을 유지할 것, 비관도 낙관도 불허할 것 등이다."
첫 작업을 대충돌로 끝냈던 대한민국이 뒤뚱거리기는 하지만 이정도 민주주의를 이루고, 경제적으로 성장하여 독자적인 문화 콘텐츠(이른바 K-컬쳐)를 창출한 것.... 이 책을 읽고 나니 기적 말고는 달리 정의할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해방 후 지금껏 저자 말대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생사를 건 인정투쟁을 해왔다. 그 결과가 오늘이고, 오늘도 우리는 인정투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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