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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휘날리며, 광기의 형재애

한국인들이 잘못한 일을 덮을때 쓰는 유용한 변명거리. 첫째,  쟤 빨갱이야. 둘째, 가족을 위해서 그랬어.  

태극기휘날리며 2004년 개봉 당시  천만 관객이 든 이유. 이 두 가지를 정확히 겨냥했기 때문이다. 

진태(장동건 분)는 얼떨결에 같이 징집 당한 동생 진석(원빈 분)을 제대시키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그러면서  점점 인간 병기로 변한다. 이념에 대한 인식도 선호도 없다. 덕분에 영화는 탈이념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진태가 영웅적인 무공을 세울때 무수히 죽어 넘어지는 북한 병사에게 감정이입을 하지 못하게 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진태 손에 죽는 사람들이 빨갱이이므로 본인은  바라지 않았어도 보는 관객은 같은 민족이 싸운다는 죄의식 조차 희미해 진다.

20년 전 한국전쟁에서 이데올로기를 거세하고 전쟁 그 자체의 비극에서 가족과 형제를 지키려 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로 만든건 신선했을 것이다. 당시 보지 못하고 이번에야 본 나는 지독한 가족주의, 광기의 형재애가 불편하다.

가족의 대들보가 될 동생을 군에서 내보내기 위해 영웅이 되어야 했던 남자의 선택과 행동은 정당한가? 

진석은 자신을 핑계로 점점 비인간적인 돌발행동을 하는 형이 못마땅하고 갈등하다 갈라서지만 끝내 형의 진심에 각성하고 형을 인민군한테서 빼내 오기 위해 역시 사력을 다한다. 진태는 연인이 보도연맹에 가입하고, 인민군 점령 시기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국군 손에 죽고, 부역자를 역성들었다고 역시 빨갱이로 몰린 진태가 수용소에서 죽은 줄 오해한다. 진태는 북한군에게 포로로 잡힌 뒤 이번에는 인민영웅이 된다.

영화 말미 둘은 재회하고 오해가 풀리자 진태는 이번에는 살아 있는 동생의 무사귀환을 위해 거리낌 없이 인민군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한다. 

아무리 동생을 지키려는 것이라지만, 뭐가 이렇게 간단해?  입대 후 내내 형과 갈등하던 진석의 각성도 좀 뜬금없다. 형이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내용은 진석이 진태와 갈등할 때 하던 말이잖아? 말로 하면 거짓말처럼 들리고, 편지 글로 보니 진심이 느껴지나? 

이 영화는 그동안 한국에서 만들어진 한국전쟁 소재 다른 영화와 다르게 이념 대결 그 자체를 다루지 않는다. 형제가 남과 북으로 나뉘는 대신 타의지만 같이 국군에 입대하여 같은 편으로 전장에 선다. 그 덕에 이념 대결을 지켜보는데서 오는 긴장감이 없다. 관객이 좀 편하게 영화를 볼 수 있다는 뜻이다. 대신 진한 형재애를 갈등의 동력으로 삼는다. 진태의 행동을 보수적인 한국 관객들이 납득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나아가 이 난리통에 자국민 보호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남한 정부가 저지른 민간인 학살(보도연맹 사건)과 주먹구구로 일관하는 당시 한국군의 실상을 폭로한다. 나름 진보적인 관객도 이 영화를 지지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가 천 만 관객이다.

이 영화는 2004년 2월5일 처음 개봉했다. 노무현 대통령을 국회가 탄핵 의결한 것이 같은 해 3월12일이다. 반공영화인줄 오해하기도 했지만, 이 영화를 볼 여력이 없었다. 2월 5일에 나는 이미 길에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을 지켜야 했으니까.

재개봉한 이유는 모르겠다. 그렇고 그런 반공영화가 아닌듯하여 보게 되었고, 보았으니 이런 후기도 쓸 수 있게 되었다만, 재개봉 할만큼  가치있고 매력적이지는 않다. 물론 이후 한국 영화가 한국전쟁을 좀 더 편하게, 부담없이, 자유롭게 만들 수 있게 하는데 기여한 것 같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