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악역이 없다. 연쇄납치범 영수가 있지만, 주요 인물과 관계 속에서 의도적으로 악한 행동을 하며 등장인물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과거로 시간여행을 반복하기때문에 자주 등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솔과 선재가 살면서 한번 겪는 사고를 일으키는 범죄자일 뿐이다. 실재로 영수는 솔과 선재 말고 다른 등장인물과 전혀 얽히지 않는다. 물론 범죄자이므로 그를 쫒는 경찰(태성이 아버지와 태성)이 있을 뿐이다. 결론. 등장인물 중에 심성이 꼬인 사람이 없어서 (극 초반 선재 라이벌 수영 선수 하나가 못된 말로 선재를 도발하지만 솔이 시원하게 응징한다. ) 스트레스가 없어서 좋았다.
2. OTT가 대세가 되면서 한국드라마는 어떤 거창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것 같다. 킹덤 시리즈나 오징어게임 소년판사, 파친코(이건 명작이다!), 마이네임, 무빙, 하이쿠키, 최근 본 더에이트쇼까지...참 좋은 드라마인데, 어후 보기 시작하려면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한다. 모든 뉴스가 극심한 분노를 유발하는 굥시대에 드라마 보면서까지 가슴졸이고, 열받는거.. 잠시나마 좀 피하고 싶었다. (아마도 조만간 나는 다시 촛불 들고 거리로 나갈지 모른다. 에고...내팔자야...)
3. 선재 업고 튀어는 이런 현재 내 감성 상태와 취향에 딱 맞는 드라마다. 예쁘고 싱그러웠다. 복잡하지 않다. 이 곱디 고운 청춘들이 사랑에 올인한다. 최선을 다해. 시간을 거슬러서까지! 시간여행이라는 설정 자체가 극적 장치이고 판타지다.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어떤이들에게는 유치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 설정을 인정하고나면 이 드라마의 세계관은 매우 명징하다. 사랑은 서로 지키는 것, 나를 희생해서라도!
3. 진짜 유치한 것은 따로 있다. 솔직히 한국의 많은 로맨틱 코미디나 멜로드라마에서 남주와 마찬가지로 여주 바라기지만 남주랑 달리 눈치는 챙길줄 아는 서부남주를 두고 개망나니 같은 남주만 좋아하는 여주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 기준으로 남주는 돈 많은거 말고는 성격 파탄자다. 오만하고. 물론 이상한 서브주인공들도 많다. 남녀 불문 벼락맞은 듯 친구의 친구를 좋아해서 사고를 치고는 세상 다 잃은 것처럼 절망하거나, 그러다 주변을 괴롭히고 있는대로 화풀이를 한다. 사춘기 수준의 심리상태에서 자기 감정 관리도 재대로 못하면서 믿도 끝도 없이 사랑의 짝대기를 긋고, 집착으로 관계를 망치다가 갑자기 개과천선 하는 유치뽕짝 로코들.
4. 선재 업고 튀어 이 드라마에는 그 흔한 서브남주가 없다. 삼각 관계가 없다. 친구의 연인을 좋아하는 따위로 외도하지않는다. 태성이와 선재가 잠깐 서로 티격대지만, 극에 밝은 기운을 불어넣는 장치 이상은 하지 않는다. 선을 지키고, 감정을 낭비하지 않은 덕에 열아홉, 스물일 때나 서른 넷일 때나 솔을 사이에 둔 이들의 관계는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다. 서브주인공과 주인공 사이 갈등을 주요 서사로 삼지 않으면서 이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은 솔과 선재 뿐만 아니라 각자 자기 생을 산다. 인혁이, 금이, 현주, 선재 아버지와 솔이 엄마, 심지어 할머니까지.
5. 처음 이 드라마에 교감한 것은 솔을 바라보는 선재의 애처럽고 처연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진짜 덕질을 하게 만든 포인트는 눈부시게 맑은 청춘들의 상큼발랄함과 심지어 기억을 다 잃고도, 아니 완전히 다른 생을 살고도 상대를 찾고야 마는 운명적인 사랑이 조화를 이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 서사에 개연성을 부여하고 공감하고 몰입하게 만든 건 김혜윤과 변우석 두 배우의 매력 덕이다.
6. 그런데 다시 드라마보며 설레는 날이 또 올까? 그냥 지금 마음껏 설레야겠다.
'길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태극기 휘날리며, 광기의 형재애 (0) | 2024.06.07 |
---|---|
영화 소울메이트의 반전 (1) | 2024.06.02 |
이스라엘은 학살을 멈추라! 팔레스타인인을 지지한다 (1) | 2024.05.18 |
그리스 신화와 한국 신화 (0) | 2024.05.01 |
기생수: 더 그레이, 생명 진화에 관한 은유 (1) | 2024.04.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