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서가에 있던 한국 신화 이야기를 꺼내 읽기 시작한 것은 순전히 달리 읽을 마땅한 책이 없어서다. 책이야 많지만, 출퇴근 지하철에서 오늘 당장 읽기 시작할 마땅한 책이 없어서 쉽게 시간 떼우기로 읽을 요량으로 골랐다.
신화에 별로 관심없다. 환단고기, 단군, 환웅... 이런 건 역사가 아니라 그냥 신화라고 단언한다. 이 책은 한국 신화를 다 글어 모은 책이다. 단군 시화부터, 고주몽, 박혁거세... 어릴 적 동화나 만화로 읽었던 건국 신화부터 무당과 농촌 마을(특히 제주도) 지역에 전하는 신화들을 모았다. 솔직히 건국 신화랑 무당들이 전하는 본풀이가 같은 급의 신화인지 잘 모르겠다. 제석신, 삼신, 측신, 조앙신, 문전신 등등... 이거 다 그냥 할머니들이 해주던 옛날 이야기 아닌가 싶기도 하고. 읽다보니 건국 신화보다 떠돌다가 어느 마을에 좌정한 신 이야기는 어이없어서 재미있다. 어짜나 소소하던지.
어렵게 태어나 자라면서 온갓 고생스러운 일을 다 겪고 끝내 복을 받는 신, 질투하고 악행을 저지르다가 옥황상제에게 벌을 받아 지옥에 떨어지는 신,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굳이 어떤 짓을 했다가 낭패를 본 끝에 착한 딸, 며느리, 부인의 구원을 받는 남편과 아들들의 이야기... 옥황상제, 용왕 조차도 마음 약하고, 어설프고, 변덕스럽다.
이런 한국 신화를 보면서, 그리스 신화가 이해가 되었다. 문화적으로 매우 다중적인 상징과 은유로 가득차 있어 고급스러운 문학의 경지로 추앙받지만, 제우스랑 옥황상제 또는 환인이 뭐가 다른가? 마고나 삼신, 바리데기는 헤라나 아테나만 못할 것이 뭐 있나? 양쪽 다 그냥 실수투성이에 질투심 많고 그러면서 때때로 용감하기도 하고 그래서 고초를 당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별로 다르지 않다. 다만, 신화의 배경인 지역, 자연, 역사, 문화의 차이로 구체적인 소재와 사건이 다를 뿐이다. 신의 이야기에 투영 시킨 사람들의 중심 욕망, 바람, 기대가 다를 뿐이다. 짧은 지식에 기반해서 다를 점을 꼽자면 그리스 신화가 훨씬 권위적이고 위계적이다. 신들의 위상도 그렇고. 한국의 신화는 토속적이면서 불교적이고 동시에 유교적인 정서들이 무시로 썪여 있다는 점이다. 또 하나. 그리스 신화는 하도 여려 경로로 접해서 한국 신들의 이름보다 더 친숙하다는 점? 한국 신들이 아직 인간이었을 때 이름은 매우 낯설다. 우리 신화는 모르면서 그리스 신화는 모르면 무식해 보이는 건...참...
결론. 한국 신화을 읽으니 대단해 보이던 그리스 신화가 별 것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누가 그러더라. 그리스 신화 속 신들이 사실 그리스 아테네의 유력 집안들을 신격화하고 그들의 온갓 잡스러운, 지극히 인간다운 다툼, 사랑, 욕망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국 신화도 마찬가지다. 인간과 신은 하늘과 땅, 지옥과 옥황상제가 있는 천상은 수시로 오가고, 서로 열려있으며, 신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가 인간이 신이 되어 받들어 모셔지기도 한다. 신화는 신화일뿐이다. 그리스 신화가 다양한 문화 층위에서 아주 여러가지로 변용되고 있는 것처럼, 한국 신화도 무궁무진한 문화적 상상력의 보고 일 수 있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PS. 환단고기. 읽지도 않고 흥미도 없지만, 이 책의 작가들은 환단고기를 한국 신화의 보고로 보더라.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어렴풋이 환단고기가 중국의 신화 일부를 조선의 신화의 일부로 포섭해서 기술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중국 신화의 주인공이 환인의 가르침을 받거나, 중국 신화 속 사건이 환인의 의도로 벌어진 일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민족주의 태동하던 19세기 말, 중국 대륙은 물론 전세계에서 일어난 신기한 일들이 다 우리 신의 조화라고 호방하고, 호탕하고, 과감하게 질러버리는 용기는..... 당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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