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1일 오전 그의 부고 소식을 듣다. 이게 뭐야~~!!! 먹먹했다. 암이라는 소식은 들었지만 수술받고 외부활동을 하기에 괜찮은 줄 알았다. 부질없는 줄 안다. 소식 들었을 때 바로 전화로라도 안부를 묻지 않은 일이 후회스럽다.
여전히 철들지 않고, 정치적으로도 생각이 갈리고, 현실성없는 사회적 발언을 계속 하는 그가 꼴비기 싫었다.
허나 그가, 우리에게, 나에게 해준 것들이....
미안하다. 사람을 이리 보내는 것이, 아니, 그리 대하는게 아닌데....마음이 아프다.
참 아껴주었는데...잘한다 잘한다 부추기고 격려해주고...
후배가 그랬다. 되돌아보니 하루가 멀다하고 만나서 술취한 그를 택시태워 보내던 때
그때 정태인 나이가 지금 현재 자기 나이보다 더 어렸다고...그렇군...
고 박현채 선생님 돌아가시던 날, 달구똥 같은 눈물을 흘리던 정태인의 모습이 아직 생생하다.
우리는 5.18 즈음이면 어김없이 광주에서 번개를 했다.
백수(?)생활을 이어가던 그는 여느때처럼 일찍 광주로 왔고, 회사 땡땡이를 친 몇몇 언니들하고
그를 데리고 망월동에 갔다. 그때까지 망월동 묘역을 간 적이 없다고 했다.
마음 아파서 갈 수 없었다고 했다. 억지로 데리고 갔고, 묘역을 둘러보다 눈물 훔치는 그를 봤다.
무등산 언저리 지실마을 어느 시골 식당에서 우리는 밥을 먹고 그는 술을 마셨다.
맑던 날이 일순 검은 구름이 몰려와 어둑어둑 흐려지고 회오리 바람이 불고 빗방울이 들쳤다. 왜 이래?
오후 5시 무렵 광주 시내 번개 장소에 일행을 내려주고 마치 취재하고 온 것처럼 아무일 없이 회사에 복귀했다.
박현채 선생님 부고 소식을 들었다.
근거없지만, 괜히 망월동 가자고 했나..? 뭐 이런 말도 안되는 생각도 스쳤다.
식당으로 전화해 알렸다. 그 자리에 있던 한 선배가 전화로 말했다.
모든 국내선 비행기에는 국정원 요원과 VIP용 비상 좌석을 대기해 놓는다면서
그걸 좀 알아봐달라고. 항공사 출입하던 선배에게 부탁했고
마지막 비행기 좌석을 수소문했으니 바로 가서 수속하고 탑승하라고 했다.
거절하더라. 이미 적당히 취한데다 울어서 정신없는 중에도 국정원 신세는
절대 지지 않겠다는 거다. 어이구~~ 증말~~
할 수 없이 다른 몇 사람이 급하게 터미널로 데리고 가서 고속버스에 태워 보냈다.
상 치르는 동안 탈진할까 걱정했는데...
어쨌거나 잘버티고, 인연은 이어졌다.
CBS 라디오 진행자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했을때 우리들 모두 득달같이 달려들어
인터넷에서 그를 구명하고 으쌰으쌰 한편이 되어 싸웠었지.
이런 거였다.
어디서 감히 누가 우리 씨탱(우리가 부르던 그의 별칭. PC통신에서 쓰는 아이디가 ctain 이었다.)을 건드려!!
미국에서 영국에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만큼 사랑하던 딸과
늘 미안하던 아내 뒷바리지하는게 행복하다고 했다.
아, 영국에서 외국인이던 자신들에게도 지역 의사(주치의제도)가 찾아왔다며
영국의 복지제도를 실감했다는 후일담을 들은 기억도 난다.
그리고 얼마후 생각도 못했는데 그가 우리 노짱 옆에 있어서 참 좋았다. 우리는 같은 편 먹은 사람들구나...
행담도 사건으로 청와대를 그만두고 혼자 산행다녀온 그를 만난적이 있었다. 몹시 힘들어했다.
술마시고 줄담배야 늘 보았던대로지만, 마음에 상처를 크게 받은 모습이...기력이 없어 보였다.
얼마 후 전화를 받았다.
"나, 니 노짱한테 대들거다. 한미FTA 반대야. 전국 순회하면서 반대운동 하러 다닐거야~ 그래도 괜찮니?"
"반대하는 국민이 있어야 협상력이 높아지지. 알아서 해~~"
그 뒤로 정말 자주 보지 못했다. 5년에 한번꼴로 봤나?
그러다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고......
또다른 후배가 전해줬다. 엄청 공부를 많이했어요. 하루에도 몇 개씩 논문을 찾아 읽는걸 옆에서 봤어요.
전부 외국 논문으로... 수천장씩 출력해서 보더라고요.
그러고보니 우리는 그를 한번도 공부하는 사람, 지금 언론에서 말하는 "지식인" 이런걸로
만난 적이 없네... 술 좋아하고 광주에 빚진 사람처럼 사는 철없는 운동권 선배? 가 그였다.
아주 오래전에 그가 쓴 글이 기억난다.
도로공사에서는 고속도로에서 과속 방지를 위해 마구 달리는 차량들 속에 끼어 규정속도로 달리는 차량을 운행한단다.
그런게 있는지 정확히 모르지만 하여간 그는 그런 차가 되겠다고 했다.
신자유주의로 내달리는 한국 자본주의의 속도를 조절하겠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검색해보니 그를 정치인이라고 규정한 소개글도 있더라.
낯설다. 정치인인 적이 있었나?
그냥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는.
고마웠어...당신과 자주 어울리던 그 시절이 나와 우리에게는 화양연화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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