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명량은 불편했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재미없었다. 이순신 장군은 인간으로서, 지도자로서도 흠잡을 곳 없는 분이나, 명량이나는 영화에서 해석한 이순신과 최민식의 이순신은 과했다. 그분은 그분의 몫을 정말 넘치도록 해냈고, 덕분에 지금 내가 이땅에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고 있는 것이지만, 지나치게 교과서적이라서 싫었다. 그걸 국뽕이라고 하더라. 나 국뽕 싫어하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 5년 내내 국뽕 맞은듯 황홀했다. 이 나라가 자랑스러워 죽는줄 알았다. 그런데 명량의 국뽕은.... 싫었다.
한산. 아, 좋다. 박해일의 이순신이 내 취향이구나...하고 깨달았다. 신중하고 꼿꼿하고, 깊이 번민하되 드러내지 않고...명량의 이순신은 그냥 안팎으로 뜨거운 사람이라면... 한산의 이순신은 뜨거우나 차갑다. 정말 멋졌다. 당시 이순신 장군께서 정말 저런 모습이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꼭 이랬을것 같다. 영화 작품으로서도 한산이 훨씬 빼어나다. 적과 아, 관과 민이 균형잡혀있다. 균형은 절제다.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절제한 결과다. 명량에서 전쟁은 이야기의 소재, 도구였다. 한산에서 비로서 전쟁은 영화가 되었다. 한산은 "전쟁"영화였다. 전쟁이 보였다. 명량은 전쟁이라는 환란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비추고, 뭔가 의미를 줘야한다는 강박이 느껴졌다. 의미는 저절로 번뜩 깨달아야지, 나 지금 의미 말하고 있어~~ 알지? 유치하지. 한산은 이야기로도 훌륭했다. 역사가 스포일러지만, 우리가 아는건 이겼다는 것일 뿐이다. 어떻게 이기느냐는 잘모른다. 기록도 없다. 그래서 영화에서 역사는 스포일러가 아니다.
비상선언. 이 영화의 최고 가치는 드디어 우리 영화에서 빌런이 "시민"일 수 있음을 처음으로 보여준 것이 아닐까? 봉준호 영화에서 한국 사회 공권력 혹은 정부는 무능하다. 그래서 "악당"이 된다. 때때로 불편했다. 권력, 정치를 악마로 치부하면 영화에서 자주 소재삼는 저런 부조리는 누가 바로잡지? 그에 대해 답하는 영화를 못봤다. 물론 비상선언이 그에 답하는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멍청하고 어리석은 것은 공권력만이 아니라, 그 권력의 근원인 "시민"의 이기심이기도 하다는 걸 보여준다. 피해자가 미안하다고 하는 것은...고귀한 이타심인가....? 그들이 그런 희생을 선택하게 만드는 시민이라는 이름의 악마들....
비상선언은 이런 미덕에도 불구하고 마무리가 깔끔한 영화는 아니다. 절제하지 않아서다. 훨씬 축약했어도 될텐데...하고 싶은 말이 많은 건 알겠는데, 다 일일이 보여주지 않아도 되는데 좀 아쉽다. 초반 악마가 본인 희망대로 될때까지는 아주 좋았다. 뭔가 일어날 것 같은 불길한 징조들이 장면마다 은근하게 티안나게 스멀스멀 퍼지는 이상한 긴장감이 좋았다. 그런데 진짜 주제 조차 이렇게 장면마다 질질 흘리면....당겨지던 끈이 절정에서 확~! 당겨져야 한다. 반대로 늘어진 전기줄마냥 퍼져버린 느낌? 이런 낭패가!
한가지만 더하자. 전도연. 카리스마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미스캐스팅이라고까지 하고 싶지 않다. 배역에 집중하지 않고 있다고 느껴져서 좀 안타까웠다. 아, 이렇게 어마어마한 배우들 모인 영화...별로다. 배우가 영화를 위해서 존재해야지, 배우를 위한 영화가 되면 곤란하다. 이런 배우 물량공세.... 이야기의 균형을 깨뜨린다. 스타 이름 값으로 뭐하려고 하지 말아라. 영화가 이야기의 힘으로 가야지 않나? 배우의 힘이 앞서면 어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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