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이브 크리스티 편 저
한국인들은 동남아시아를 잘모른다. 관심이 없다. 한국에 일하러온 이주 노동자들의 국적으로 동남아시아를 접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기껏해야 태평양에 면한 아름다운 휴양지로 기억할지도. 국제 뉴스에 약간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미얀마와 태국의 군사 쿠테타 정도는 알려나? 베트남 전쟁에 한국군이 미군의 용병으로 참여한 것을 알면 많이 아는 축에 속하지. 하여간 아무려나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한국 사람들에게 가난하고 못사는 무더운 나라일 뿐이다. 우리랑 완전히 다른, 관계없는 어느 먼 나라.
어쩌다 이 책이 우리집 서가에 꽂히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산 기억이 없으니 남편이 샀겠지. 남편 전공하고도 거리가 멀고, 관심도 아니니 이거 참...환상특급에나 나올법한 일이다.
좋은 책이다. '편 저'라고 하였듯이, 클아이브 크리스티의 단독 저서가 아니다. 제자들에게 수업했던 교재를 책으로 펴냈다고 서문에서부터 밝혔다. 실재로 시기별로 개괄한 뒤, 참고가 될만한 주요 책을 소개하고, 그 책 가운데 반드시 읽어야할 부분을 발췌하였다. 학생들이 이 시기 동남아시아를 균형감 있게 이해하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그래서 서방 전문가 또는 식민제국의 경영자들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집단 내 다양한 분파들의 주장, 연설문을 같이 읽을 수 있다. 베트남, 필리핀, 인도네시아, 버마의 20세기가 책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만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의 20세기도 빠뜨리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
덕분에 미, 중, 러, 일본 등 한반도 주변 강대국들만이 포진해 있던 내 국제정치 이해도(지도) 안에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들이 들어와 영역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인식 체계 안에서 그들도 국제정치의 당당한 행위자로서 지위를 허락 받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동남아시아의 20세기가 한반도의 20세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게 해준 고마운 책이다.
우리는 식민지를 경험한 약소국으로서는 매우 예외적으로 OECD에 가입하고 G7 나라들에 버금가는 경제적 풍요를 구가할 뿐만 아니라 선거를 통한 정기적인 정권교체가 이뤄지면서 민주주의에서도 일정한 성취를 이뤘다. 외교에서도 우리가 상대하는 나라는 죄다 세계 1, 2위를 다투는 강대국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우리보다 경제적 성장이 뒤지고 아직도 쿠테타가 벌어지는 동남아시아 나라들하고 우리는 뭔가 차원이 다르다고 착각한다. 우리 나라에 있는 이주 노동자들과 현지 공장에서 일하는 그 나라 노동자들을 대하는 태도와 인식에서는 오만이 느껴질 정도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한반도의 20세기 역사, 좁게 정치사는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20세기 궤적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이들 나라들은 2차 대전으로 열린 해방의 기회를 민족적 국가적 일체감과 정체성을 확립하는 기회로 삼으려는 열망에 들떴지만 독립한 근대국가라는 목표를 빼면 그 목표를 이루는 방법에 합의가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식민지제국들이 식민지 약소국 내에서 그런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 기술을 익히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분활, 차별을 통한 분열은 중요한 지배 방식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해방의 문 앞에 다다라 그 문을 열고나자 곧바로 분열했다. 해방과 독립투쟁에 가장 그럴듯한 논리를 제공한 공산주의 사회주의가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기는 했지만, 압도하지는 못했다. 아웅산의 암살과 수까르노의 퇴각은 그들의 지도력이 얼마나 위태로운 것이었는지를 상징한다. 우리 역시 해방직후 여운영과 김구 김규식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암살당했다.
나라마다 역사, 상황, 주변국에 따라 조금씩 변형이 있고 시차는 있지만, 한반도가 식민지로 전락하고 독립투쟁을 벌이고, 해방전후 지독한 이념대립과 분단, 좌우대립, 내전을 거쳐 군부독재로 귀결되는 과정과 동인은 본질적으로 같더라. 식민지 약소국이 식민 제국의 억압, 탄압, 분열 책동을 극복하고 내부의 단합과 통합을 이루기 위해 벌인 지난한 투쟁, 해방, 분열, 실패의 서사는 똑같았다. 작동 원리도 같다. 하도 같아서 새삼 반갑고, 그래서 서럽더라.
극복해야 할 과제도 비슷하다.
이 책 말미에 편저자는 이들 나라들이 대체로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방편으로 권위주의 정부(좌우를 막론하고)를 선호하고, 이 권위주의 체제에서 일정한 경제 성장을 이뤘지만 평화적인 정치변화를 끌어낼 능력이 있는가에 정치 안정의 성패가 달렸다고 진단했다.
이 책은 크게 1975년까지 상황을 토대로 씌여진 것이므로 이후 상황은 반영하지 않는다. 실제로 2022년 현재 어떤 나라(한국, 인도네시아, 말레시아)는 나름 정권의 탄력성을 확보하고 민주주의 국가로 나간 나라도 있고, 여전히 군부 쿠테타가 반복되는 나라(미얀마, 태국)도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21세기에 한국은 동남아시아와 처지가 다르다고, 위상이 다르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과연 그런가?
민주주의와 경제부분에서 가장 눈부신 성취를 이룬 한국 조차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정권의 본질' 자체가 "계급간, 지역간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필요한 정책 실행을 방해"하는 걸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또한 "이런 정부의 권력 기반이 기본적으로 기업, 지주, 행정관료와 기술관료 엘리트와 (한국은 아니지만) 군부에게 있고, 착취와 부패를 대충 넘어가주는 사회, 경제, 그리고 정치적 현상유지가 그들의 이해관계와 맞아 떨어지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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