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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해방일지, 숨은 의미 찾기

방금 나의 해방일지 1회~16회 복습했다. 12회차부터는 매번 재방송까지 봤으니 3번 이상 본 것도 같다. 명작 소리를 듣는 문학 작품이 명작인 것은, 시대와 공간에 구애받지 않은 이야기때문이다. 그 이야기가 씌인 당대, 배경이 된 나라, 지역, 동네를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공감할 부분이 있어서다. 심지어, 같은 사람이 연달아 두 세번을 읽어도 그때마다 미처 몰랐던 의미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를 명작이라고 하면 지나친 과장이라고 할지 모른다.  허나 최소한 "좋다"는 말은 듣고도 남을만큼 정말 "좋은" 드라마인건 분명하다. 몇 번을 다시 봐도 물리지 않고, 새로운 감동을 받는다. 복습하며 새로운 의미로 읽은 장면과 대사들은, 이를테만 이런 것들이다.

 

손석구 배우가 워낙 주목을 받아서, 그를 중심으로 이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이 많다. 나 역시 그렇다. 하지만, 인간사 모든 일이 그렇듯, 일방적인 관계는 없다. 구씨와 미정의 관계에서 둘은 끊임없이 밀당한다. 대사를 주고 받고, 자극을 주고 받으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성장한다. 

 

드라마가 구축한 세계에서 미정이 구씨에게 처음 관심을 갖는 것은 집에서 혼술하다 취해 넘어져 얼굴에 피를 잔뜩 뭍힌채 뒹글다가 미정 아버지에게 발견되어 집밖으로 끌려나왔을 때다. 미정이 퇴근 길에 허둥대는 엄마 아빠 손에 끌려나오다시피하는 구씨를 봤고, 구씨도 미정을 흘낏 보며 묘한 표정을 짓는다. 망했다..된장마즐...하필...이런 표정...

 

구씨는 다시 한번 술먹다 쓰러져 이번에는 발등에 상처를 입은 모습을 미정에게 들킨다. 천성이 사교적이지도 나긋나긋하지도 않지만 수더분한 척 연기하며 하루를 견디던 미정이 사업자금 대느라 쪼들리는 남친을 위해 대출 받아 돈을 빌려줬다 받지 못해 신용불량자 처지에 내몰린 상황에서  잠깐 아버지 일 돕는 시간 말고 술로 하루를 마감하고, 자해하듯 자신을 돌보지 않는 구씨가 맘에 밟혔다.

 

그러다가 미정이 구씨를 달리 보기 시작한 계기는 아주 사소했다. 1회에서 엄마는 구씨에게 고구마줄기 나물 반찬을 챙겨 미정 손에 들려 보내며 말했다. 내일 아버지는 아침  7시부터 일 시작할거지만 구씨한테는 9시까지 나오면 된다고 전하라고.  7시에 일 시작한다는 말을 하면  9시까지 나와도 된다고 해도 구씨가 알아서 할거라고.  미정은 7시 얘기는 하지 않는다. 9시까지 오면 된다더라고만 한다. 술꾼에게 7시는 무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미정은 7시에 집을 나서다 그 시간에 일하러 나오는 구씨를 본다. 어? 그냥 막 술주정뱅이 막사는 사람은 아니네....

 

미정이 대출이자 독촉장이 든 우편물을 구씨에게 받아달라고 부탁하기로 용기를 낸 건 이 일이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그저 구씨가 불쌍한 주정뱅이였을 뿐이라면 집에 들키면 안되는 우편물을 받아달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1회를 보고 손석구 배우는 왜 나왔지? 대사가 한마디도 없어 이상해 하다 구씨가 예사롭지 않기 시작한 건 2회였다. 미정의 부탁에 시쿤둥 한 것 같던 구씨는 정작 우편 배달 기사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자 일 하다 말고 뛰어 나가  아버지 알까무섭게 제꺽 받아 놓더니,  며칠 후 같이 술마시자며  낯낯하게 집까지 들어온 창희가 우편물을 보지 못하게  몸으로  막아선다. 아니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16회까지 다 보고 다시 보니 이거 이미 추앙을 시작한거잖아?

 

그럼그렇지, 다 이유가 있지. 전사가 있어던 거야. 미정에게 구씨가 보이기 시작한 건 여름이지만, 구씨가 미정을 의식한 것은 훨씬 전 눈발날리던 그 해 겨울 어느날부터였다. 동생 자살 시킨(?)것으로 몰아 구씨를 제거하고 구씨 몫을 다 차지하려던 백사장이 친 덫에 걸리기 직전, 아마도 그날도 술기운에 비몽사몽이던 구씨를 깨워 당미역에 내리게 한 건 미정이었다. 구씨는 미정 때문에 염씨네 집 근처를 서성대다 근처에 집을 얻고, 일 좀 도와달라는 미정 아버지 제안에 못이기는척 응한 건 미정과 그런 인연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런 장면은 줄줄이 사탕처럼 이어진다.

 

기정이 이런말을 한다. 남자랑 섹스를 하고 싶은게 아니라 대화를 하고 싶다고. 구씨는 미정에게 10회 끊고 내 얘기를 들어 달라고 한다. 그리고 구씨는 호스트바에서 여자 손님을 접대하는 사람이었다. 박해영 작가는 호스트바를 찾는 여자들을 돈을 주고라도 내 말 들어줄 상대가 필요한 사람들이라고 본 것이 아닐까? 이런 직업군 남자의 어둠과 그런 직업군을 찾는 여자들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의 교집합으로써 구씨라는 인물을 설정했을지도. 어둠의 심연에 깃든 사연, 사람들 상대하는 일인데도 사람이 싫은 남자. 이 모순에서 구씨의 이야기를 구축한 것 아닐까?

 

15회가 되어서야 미정은 구씨에게 이름을 묻고, 구씨는 구자경이라고 이름을 밝힌다. 그런데 구자경이라는 이름은 15회에 처음 나오지 않는다. 4회에서 구씨가 미정의 모자를 줍기 위해 날아오른 다음, 5회에서 창희는 구씨가 운동 선수 아니었냐며 구씨 성 가진 운동선수를 검색하다가 몇 개 이름을 나열하는데 구자경도 들어있다. 6회인가에서는 둘이 자주가는 편의점 주인이 구씨에 대해 꼬치꼬치 묻는데 이름 물으까봐  속으로 이름을 지어냈는데 미정이 읊은 이름 중에 구자경이 있다. 그 순간 구씨가 살짝 놀라 고개를 드는 대목이 있다. 복습하면서 구씨가 호스트바로 흘러들기전에 정말 운동선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검색하면 이름이 나올정도로 어릴적에는 유망주였다가 어떤 사연으로 운동을 그만두고 이 업계로 나선게 아닐까....절망이 커서 불행을 줄이기 위해 행복을 포기하는 사람이 된 건 아닐까...술로 하루를 버티는 중이 아닐까... 멀리 뛰기 하려도 돋음 닫기 전 고추밭 사이를 달릴 때 폼이  완전히 프로잖아?  정말 육상 유망주였을 것 같은...이게 연출인지 손석구 배우가 원래 육상을 했던 사람이라 그냥 이런 장면이 된 건지는 모르겠다만...

 

14회에 구자경 방에 맡겨진 젖먹이 아기. 처음 볼때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비유인지,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난데없는 에피소드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끌 유모차 있는 여자들 얘기하려고 이런 무리수를? 그런데 다시 보면서 자경이 일을 끝내고 들리는 바에서 거기 마담과 나누는 대화 속에서 답을 찾았다. 자경은 마담에게 아이를 본적이 있느냐고 묻고, 어떤 정신나간 놈이 아이를 데리고 술먹으로 왔더라고 하자 그 마담이 말한다. 새 한마리가 날아든 느낌이었겠군요....구씨의 답답하고 어두운 삶으로 날아든 새 한마리...구씨 방에 잠시 맡겨진 아기는...바로...미정이구나... 전에도 이 바에서 내놓은 저녁 식사 반찬에 고구마줄기 무침.... 미정을 만나지 못한 지난 2년여 동안 구씨는 계속 미정과 산포 집을 그리워 하고 있었던 거다. 

 

11회 마지막 장면에서 구씨는 2022년 새해 첫날 내리는 눈을 보며 미정을 생각하고, 12회 마지막 장면에서 미정은 달라진 모습으로 서울거리에서 눈을 맞으며 환청처럼 구씨의 목소리를 듣는다. 16회까지  다 보고 나면 헤어진 시간, 다른 공간에서 그들이 서로 그리워 하고 있었음을 이렇게 연출한 것이라는 걸 알게 된다. 구씨는 끊임없이 미정을 찾고, 미정은 구씨의 전화를 기다리는 거지. 미정은 기다린다기보다 마음속에 구씨의 자리를 만들어 놓고 추앙하고 환대하고 있었던 거지.

 

14회 말미에 구씨는 미정에게 연락한다. 미정에게 처음 문자 보냈을 때처럼 미정의 전화번호는 늘 미정의 아버지에게서 받는다. 미정이 구씨가 무엇을 하던 사람이든 상관하지 않듯이 아버지 염제호씨도 구씨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일체 묻지 안찮아. 일을 같이 해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어. 염제호씨는 구씨를 안거야. 괜찮은 사람이라는걸. 그러니 자식 중에 유일하게 칭찬한 막내딸의 번호를 구씨에게 그것도 두 번씩이나 직접 알려준거지. 미정은 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불쌍하고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했지만.... 미정의 단단함, 창희의 따뜻함, 기정의 건강함은...이 두 분 덕아닌가? 외지인을 처음부터 그냥 지금 그 모습대로 정직하게 보고 식구로 받아준 건 이 두 어른들이었어. 

 

이런 장면도 있어. 제삿날 창희가 아버지에게 남의 차 몰지 말라고 꾸지람을 듣던 장면. 어색하고 불편해서 따로 음식을 챙겨 구씨와 함께 나가려는 미정을 곽혜숙 여사가 말린다. 그냥 있으라고. 그 장면도 기억에 남는다. 구씨를 이미 가족으로 생각한다는 거니까. 남이 아니라는 거잖아. 

 

구씨는 행복을 줄여서 불행의 크기를 줄이려 한다. 구씨만 유난하거나 특별한 아픔이 있어서가 아니다. 현실에서 우리도 그렇게 산다. 오늘 즐거움을 참으면서 내일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인간에게 내일이 보장되어 있지 않지. 오늘 참은 즐거움이 내일의 즐거움으로 보상받지 못할 확률이 더 크다. 미정하고 비정규직 후배가 이런 얘기를 해. 더울 때 더운 걸 저장했다가 추울때 꺼내 쓰자고. 그럴 수 없잖아. 그런데 사람들은 행복은 아끼면 다음에 돌려 받을 수 있거나, 불행을 막는데 보탬이 될 것처럼 오늘의 행복을 미래로 유예한다.

 

더 나쁜 것은 행복을 유보하면서 이게 남을 위한 것처럼 위장한다는 거지. 어떤 사람은 구씨가 서울로 간 것은 미정네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해석을 내놓는다. 그럴수도 있지만, 구씨는 그냥 불행을 줄이려 행복을 피하던 습관을 이어갔을 뿐이다. 관성의 법칙은 물리의 세계에만 작용하지 않아. 인간의 삶에도 관성의 법칙은 있고, 하던대로 하려고 멈추거나 나가는 걸 회피하는 건 매우 일상적이지. 구씨가 산포를 떠난것은 그냥 하던대로 했을 뿐이야. 구씨가 신회장이 찾아오고 현진 형이라는 사람이 졸라도 미정 옆에 있었으면.... 지금 우리가 아는 드라마가 아니라 다른 얘기가 됐을 것이야.  개과천선 해피엔딩이 아니라 아마도 또다른 고난과 장애를 마주하겠지. 우리네 삶처럼.

 

이 드라마를 다시보며 느낀 점 중 하나는 볼수록 단단하게 짜인 드라마 세계 그 자체다. 대사 하나, 장면 하나 허투루 쓰이지 않는다. 조연, 단역은 물론 새 한마리, 개 한마리, 하늘거리는 갈대 조차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볼때마다 의미를 발견하는 건 당연하다. 

 

정말 장면 하나하나 의미가 있어서 쓰라고 하면 모든 장면에 내식대로 주석을 붙일 수 있을 것만 같다. 잊지 못할 드라마다. 보고싶으면 또 봐야지. 그럼 박해영 작가는 내게 또 새로운 얘기를 들려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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