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 이름이 조우화. 검색해 봤다. 조우화 이름으로 편찬한 책이 한 권(인간의 역사)이 더 있기는 하지만, 저자의 이력은 더이상 알 길이 없다. 동녁문예에서 서 이 책을 초판 발행한 것은 1984년. 이 시기 많은 책들의 저자와 역자는 가명을 썼다. 심지어 그냥 해당 출판사를 역사 혹은 편찬자로 올려놓기까지 했다. 조우화라는 이름도 가명일 수도 있겠다.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책 뒤에 남긴 내 서명에 따르면 1988년 6월 27일이다. 같은 해 6월에 찍은 3판 중 한 권이다. 그리고 1989년 8월 14일에 다시 한번 새로운 감동으로 읽었다는 글과 함께 서명을 남겼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1924년8월 12일에 세번째 읽었고, 오늘자로 필사를 마쳤다. 책 전부를 필사한 것은 아니고 읽은 책에서 부분 부분 새겨야 하거나 기억하고 싶은 대목은 꼭 발췌해서 공책에 자필로 옮겨 적는데, 아리랑을 그렇게 하지 않은 것 같아서 잊지 않으려고 발췌 필사를 시작했는데, 오늘 그 일을 끝낸 것이다.
1988년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말 할 수 없은 감동을 받았다. 호적 나이로 딱 스무살이었다. 많이 설렜다. 체게바라 보다 더 낭만적이고 멋지다고 생각했다. 1919년 삼일운동을 보고 가만히 앉아서 체포를 기다리는 방식으로 독립을 찾을 수 없다고 깨달은 열 네살 소년은 가출을 감행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먹었다는게 더 정확할 것이다.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내 인생의 책이라고 주저없이 말할 수 있다.
김산이 님웨일즈를 만나 털어놓은 개인사는 고스란히 한 인간의 성장사이자, 조선인 출신 혁명가의 지극히 사적인 시선으로 정리한 20~30년대 중국을 중심으로 펼쳐진 반제국주의 해방 투쟁의 미시사다. 11살 소년이 처음으로 주권을 빼앗긴 나라 백성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겁도 없이 압록강을 건너 무장 독립운동 단체를 찾아가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고, 톨스토이주의자였다가, 무정부주의자였다가, 공산주의자로 변모하고, 그 사이 배신당하고 구속당해 죽을 고비를 두 번이나 넘긴 끝에 오류를 인정하는 진정한 혁명가로 거듭나는 과정은 너무도 생생하고, 생생한만큼 아프다. 어딘지 어설프고 조숙한 소년이 톨스토이에 심취해 이상주의자가 되었다가 20~30년대 중국과 아시아에 몰아친 혁명 투쟁의 광풍 속에서 수많은 사람과 만나고 작별하며 상처를 껴안고 속 단단히 영근 완성형 혁명가가 되어 갔다.
지난해 서가에서 이 책을 다시 꺼내 읽고 난 후 그의 사랑 이야기에 주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유시 참변에 희생된 것으로 보이는 풋풋한 첫사랑 소녀, 혁명 동지로 만나 동거했으나, 서로 자기 방식을 포기못해서 갈등하던 차에 구속 당하면서 끝난 두번 째 사랑, 두 번의 구속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아무도 믿지 못하고 있던 자신의 지친 영혼을 달래준 여인까지. 마지막의 작고 귀여운 여인과는 "마침내" 결혼했다. 님웨일즈에게 자신의 생을 구술하면서 옳고 그름은 유동적이며, 옮고 그름을 논하는 것으로 사람을 단죄하는 짓을 하지 않게 되었다면서 인간이 오류를 저지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전에 없이 정신적으로 안정된 면모를 드러낸다. 이러는데 그 작고 귀여운, 그의 표현대로 "마누라"의 역할이 컸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김산은 요즘 말로 비혼주의자였다. 결혼은 속박이고, 자유를 억압하며, 혁명가에게 결혼은 사치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었다. 그랬던 그가 마침내(?) 결혼에 이르는 경위를 설명하며 "충성심(헌신일 것이다)이 인류의 가장 귀중한 성질 인 것 같다"고 토로할 정도였다. 후일담이지만 김산은 결혼 후 1년만에 임무 수행을 위해 부인과 떨어져 활동 무대를 옮겼고 그러다가 어떤 연유인지 중국 공산당에게 숙청당했다. 아이가 태어난 사실도 모른체.
이렇게 이 책의 내용을 정리하게 되어 마음이 놓인다. 사실 통째로 암기하고 싶을만큼 여전히 심장을 뛰게 하는 내 인생의 책이다. 많은 사람들이 김산의 이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제가 3.1절 106주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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