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 20주년을 기념해 재개봉했다. 재개봉할만큼 한국에서도 유의미한 영화였었나? 검색을 해보니 개봉 당시 영화 평론가들은 그다지 좋은 평을 하고 있지 않다. 심지어 스토킹 아니냐고 하고, 주급 40센트 짜리 재재소 막노동꾼이 노년에 어떻게 저런 비싼 요양병원 간병비를 감당하느냐는 매우 현실적인 얘기를 하며 몰입을 못했다는 솔직한 평을 써놓았다.
개인으로 보면, 20년전이면 2004년. 그 해 10월 개봉이니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이 기각당한 후이기는 하지만, 이런 영화가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 같다. 영화 제목인 노트북은 영화를 보기 전까지도 휴대용 PC를 말하는 그 노트북인가 했었다.
이 영화 미국에서는 중년들의 환호를 받으며 꽤 장기 흥행했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누적관객 80만여명. 이 정도로 흥행에 성공했다고 보기 어려울 것 같기는 하다. 그런데도 왜 재개봉? 이유는 모르겠다.
영화를 보고나니 이 영화가 2천년 대 초, 북미 중년 관객에게 통한 이유는 알 것 같다. 지금 관점으로 보면 도시에서 온 밝고 예쁜 싱그러운 여자에게 첫 눈에 반한 젊은 남자가 여자에게 들이대는 방식은 용납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막무가내고, 예의도 없다. 40년대에는 그게 낭만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2004년에 아마도 이 영화를 본 중년들에게는 로멘틱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것만은 분명해보인다. 첫만남부터 거부감이 드는 영화에 그렇게 많은 관객이 호응하지 않았을테니까.
둘이 만나 사랑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과정은 두 배우의 빛나는 미모를 빼면 매우 고전적이다. 남자가 여자에게 남 생각말고 네가 원하는 선택을 하라고 하고, 여자가 남자에게 너와 있을 때 비로소 내가 나로 느껴진다고 하는.... 남자의 구애가 여자에게 통한 것은, 틀에 박힌 생활을 하던 부잣집 아가씨에게 남자의 저돌성과 거침없는 태도가 자유로움으로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 조차도 참으로 고색창연하다. 만나서 사랑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이어지는 이 모든 전개가 다 어디서 본듯한데, 그럼에도 이 영화가 관객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졌다면, 바로 그런 뻔한 순수, 변치 않는 사랑에 대한 사람들의 보편적인 감성, 기대, 로망을 건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들이 겪은, 혹은 지나온 시간속 사랑을 순애보로 기억하고 싶은 욕망을 투영한 것일 수도 있고.
2차 대전의 전쟁터가 아니었던 미국을 비롯한 북 중년 이상 노년들에게 40년대는 친구를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던 시대이기도 하지만, 그들 기준으로 마지막 낭만적 연애가 가능했던, 막 드리대는 남자의 어리광과 무모함이 젊은이다운 패기와 열정, 싱그러움, 남자다움으로 허용되던 시기였던게 아닐까? 50년대로 넘어오면 여성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더는 이런 식의 연애는 불가능해졌으니까.
이제 곧 노년을 앞두고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이제 막 20대에 접어든 젊은이도 순수하게 사랑 하나에 몰두하고, 그 사랑을 유지하며 살고 싶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영화는 그런 소망과 로망을 담은 영화다. 이런 순수의 시대를 소재로 한 영화가 더는 없을 듯 싶기도 하고. 또한 두 사람이 헤어져 있는 동안 인연을 맺은 사람들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지 않는 점이 좋았다. 각자가 다른 상대에게 역시 최선을 다했고, 곱게 서로 존중하며 이별한다. 난 이영화에서 이 점이 좋았다.
PS. 이 영화는 내가 덕질 중인 변우석 배우가 인생 영화로 꼽았다기에 본 영화다. 이렇게 죽을때까지 한 사람만 사랑하는 역할을 해보고 싶다고 했고, 선재 업고 튀어 에서 어느 정도 소원을 이뤘다. 몇 번을 과거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도 한 솔이만을 사랑한 선재는 노아의 21세기 버전이라 할만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여자들이 원하는 성격을 지녔다. 막무가내로 자기 생각만으로 사랑을 시작하지 않고, 여자에게 정성을 다하되 여자가 그에게 마음을 보여줄때까지 기다리며, 사랑을 시작한 후에도 상대가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한다. 하고 싶은 걸 하도록 응원한다. 무엇보다 늘 다정하다. 다정함이 이긴다. 살아남은 인간을 비롯한 현생의 많은 생명체들은 다정해서 선택받은 것이라고 하지 않은가? 혼자 잘나서가 아니고, 남에게 다정하게 곁을 내주는 것.... 그것이 오래 살아 남는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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