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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전쟁과 평화를 생각함.

10대에 읽는 세계 명작 소설을 마흔줄에 읽었다. 헐리우드 영화로, 최근에는 영국 BBC가 만든 드라마로 이 명작을 접했다. 이 영상물들이 소설보다 가치가 떨어진다는 말은 쓸데 없다. 영국 BBC 드라마를 보면서 비로소 이 소설을 직접 읽어보고 싶어졌으니까.

 

영화, 드라마와 원작은 물론 다르다. 길어야 3시간 안쪽인 영화는 특히 안드레이-나타샤-피에르 이 세 청춘의 로맨스를 전면에 내세운다. 그럴 수 밖에 없겠지. BBC 드라마는 이 정도는 아니고 좀 더 다양한 군상들의 생을 보여주지만 여전히 로맨스가 극을 이끌어 간다.

 

물론 톨스토이도 이 세사람의 성장통을 중요한 씨줄로 삼아 당대 왕족과 귀족, 군인과 병사, 농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들을 날줄로 엮어 대서사시를 완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을 세 사람의 사랑이야기 쯤으로만 아는 것은 영화 시작 10분만에 극장을 나온 것과 같고, 16부작 드라마 첫 주 2번만 보고 만 것과 같으니, 원작을 읽어보기를 진심으로 권한다. 이 소설이 세계 명작의 반열에 오르고 톨스토이가 위대한 소설가로 명성을 이어가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고, 진심으로 그 이유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작품을 평하고 논할 자격은 내게 없다. 다만, 몇 가지 인상적인 것을 꼽자면 이런 것들이다. 우선 톨스토이 자신이 러시아에서 손꼽히는 명문귀족 출신이면서도 귀족들의 한가로울 뿐만 아니라 낭비에 가까운 생활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톨스토이와 같은 시대를 산 우리 조선의 어느 양반이 이렇게 같은 계급에 속한 한가한 인생들을 가차없이 까발려 문학적으로 조롱할까? 톨스토이보다 조금 앞선 세대에는 허생전을 쓴 박지원이라도 있지. 

 

이 소설은 그냥 소설이 아니다. 소설은 개연성이 있기는 하나 허구로 만들어진 세계에서 허구로 만들어진 인물들이 뛰어노는 얘기다. 그런데, 이 전쟁과 평화는 마치 다큐멘터리 같다. 특히 프랑스와 러시아아 사이 나폴레옹 전쟁의 실상은 아주 생생하고 실감난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톨스토이는 그냥 작가가 아니라 사상가로서 역사란 무엇인가를 천착해 들어간다. 전쟁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간 피에르와 나타샤 니콜라이와 마리아의 평화로운 가정생활은 마치 이 대하 소설을 가족드라마인양 착각하게 만들지만 결국 마지막은 톨스토이 자신의 역사관, 세계관을 마치 논문처럼 정리하고 있다. 솔직히 당혹스럽기도 하고, 어렵기도 했다. 이게 번역때문일까?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된다. 물론 지적 역량이 모자라서지만, 나는 그의 역사관에 선뜻 동의하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전쟁과 평화는 다이제스트로 읽고 말거나 영화나 드라마로 떼울 것이 아니다. 그건 손해다. 이런 걸 읽지 않고 생을 마치는 것은. 명작은 명작으로서 값을 한다. 

 

PS. 많은 사람들은 나타샤를 성찬하고, 이 소설의 주인공으로서 그의 매력을 입에 올리지만...글쎄...나는 피에르가 훨씬 멋지고 매력있더라. 이 어리버리 뚱뚱이 백작이 산전수전 공중전을 겪고 미몽에서 깨어나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자아를 지닌 어른으로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자니 참 흐뭇했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성향을 안드레이와 피에르에 나눠 투사했다는데, 그가 끝내 되고 싶은 이상적은 자아는 피에르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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