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필리핀에 머물때였다. 숙소 주인이 한국인이었다. 목사 부부였는데, 게스트하우스 열어 한국인들 상대로 장사하면서 카톨릭이 대부분인 필리핀에서 개신교 목회활동을 했다. 뭐 그런건 중요하지 않고, 필리핀 친구가 빈민운동을 했는데, 그 친구따라 마닐라 중심을 흐르는 파식리버 옆에 들어선 판자촌을 다녀왔다고 했더니 예전 50~60년대 청계천도 그곳 못지않게 더러웠다고 말해주는 것이었다. 당시 서울이 마닐라보다 더 후지고 더러웠다고도 하고, 이 사람들 가난한 것은 당시 한국 사람 가난한 것과 비교가 안된다나? 우리가 더 가난했다는 것이다. 아~ 그랬어요? 저야 모르죠. 하고 대꾸하며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솔직히 실감하지 못했다. 내가 그 때 가본 파식강가에 들어선 판자집은...상상초월있거든. 그런데 예전에 청계천가는 이보다 더했다고?
얼마전에 올해 일흔 둘인 어른을 만나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해방전에 태어났다는 그는 어린시절과 청년시절에 겪은 가난은 지금 젊은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것이라며, 정말 말도못하게 가난했고, 우리 나라가 이렇게 발전하리라고는 자신은 꿈도 꾸지 못했다고 고백아닌 고백을 했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이 세대에게 박정희는 어쩌면 진짜로, 진심으로 자랑스럽고 고마운 사람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요즘 노컷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구한말 조선을 다녀간 외국인들이 한결같이 당시 조선이 몹시 가난하고, 도성의 좁은 거리는 발딛을 곳이 없을 정도로 오물이 넘치는 곳이라 했다고 한다. 한중일 세 나라 중에 조선이 가장 뒤떨어진 나라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가난한, 세계 최빈국이었던 이런 나라. 내전으로 먹을 것이라고는 구호품 옥수수 가루로 끓인 꿀꿀이 죽밖에 없는 배고픔이 일상이었던 사람들에게 지배자가 조선 사람이건 일본 사람이건 혹은 쿠테타를 했건 큰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열에 여덟은 권력자와 주변 소수자에게 돌아가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 이뤄지고, 고작 둘을 여덟이 나눠 먹은 것이 '진실'이었을 지라도 당장에 굶지 않게 된 것에 감지덕지했을 것이고, 조금 지나 하루에 세끼라도 따박따박 챙겨먹을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감격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때마다 이 밥을 누구 덕에 먹게 되었는지 동네방네 팔도강산 구석구석에서 떠들며 각인시켰다면?
게다가 당시 그들은 젊었다. 개같이 벌었어도, 설령 지금 정승처럼 쓰고 있지 않아도, 젊은 날 날마다 쓴물 토했어도 젊었으니 좋은 기억이고, 또 이렇게 고생담마져도 추억으로 변색될만큼 시간이 흘렀다. 그들은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이 나라가 이만큼 사는데 내 인내도 한 몫했노라고. 그리고 지금 손에 쥔 것을 다시 놓칠까 두려운 것이다. 인정욕구와 불안감이 요상하게 착종되어 먹고사는 것 말고 다른 가치에 무조건 방어막을 치고, 적대감을 표출한다. 그리고 그들의 젊은 시절 박머시기 일당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 귀에 저것들이 니 것 빼앗을 거라고 속삭이며 불안을 부추긴다....
물론 그들의 생각과 행동이 옳다고 동의해줄 생각은 전혀 없다. 그래도 이해해줄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들이 겪어온 가난, 자식은 굶기지 않으려고 했던 인내와 노력은 인정한다. 그러나...자신들이 그랬다고, 우리한테 자기들처럼 살라 한다면?
이상한 일이다. 정말 젊은 시절이 진짜로 자랑스러웠으면, 자식에게 들려줬을 것이다. 그러지 않았다. 누구나 조금씩 비겁하고 비열하게, 귀 닫고, 시키는대로, 냉정하게 들리겠지만, 노예로 산 시간이었다. 60~70대 부모들이 한결같이 자식에게 하는 말. "너는 나처럼 살지 마라." 자랑스럽지 않은, 그래서 들려주고 싶지 않은 진짜 '자기'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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